한 줄의 斷想
[22086]저임금 블루칼라의 소득이 늘어 경제 양극화가 개선된다는 분석이 잇따라 나오고
ironcow6204
2024. 2. 29. 10:27

부와 소득의 양극화는 자본주의 사회가 감당해야 할 필요악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2013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저서 ‘21세기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한 이후, ‘빈익빈 부익부’가 사회 통합을 해치는 최우선 해결 과제라는 통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최근 부유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경제의 양극화가 예전에 비해 둔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 계수(세전 소득 기준)는 2022년 0.396을 기록, 2016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0.4 아래로 내갔다.
복지 정책의 효과 등을 반영한 세후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지니 계수는 2011년 0.388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감소, 2022년 0.324까지 줄어들었다. 0~1 사이인 지니계수는 하락할수록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를 거치며 고용 시장에서 근로자가 줄어 ‘몸’으로 일하는 ‘블루칼라’ 근로자들 임금이 올라간 반면, AI(인공지능) 등 신기술이 ‘머리’로 일하는 IT 등 고소득 사무직 일자리를 더 빨리 없애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미국에선 지난해 7월 기준으로 연방 최저임금인 시급 7.25달러(약 9500원)를 받는 근로자가 전체 시간제 근로자의 0.1%도 안 된다고 조사됐다.
저숙련·단순직 근로자들조차도 이미 최저임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미경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 기간 저소득층 근로자들의 소득은 8%가량 치솟은 반면, 중간·고소득자들의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른바 ‘블루칼라 역습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주(州)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재닛 데즈먼드씨는 시간당 14달러(약 1만8000원)를 주고 아르바이트생을 쓴다.
뉴햄프셔주의 경우 최저임금이 시간당 7.25달러(약 9400원)인데, 아이스크림을 퍼내거나 덩어리 빵을 자르는 단순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에게 최저임금의 거의 두 배가량을 지불하는 셈이다.
데즈먼드씨는 뉴욕타임스(NYT)에 “시간당 7.25달러로는 어떤 누구도 고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단순 육체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임금 압박이 심해졌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각박해진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한 명제처럼 여겨져왔다.
그러나 최근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임금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어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완화됐다는 내용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저소득층의 소득이 가파르게 올라, 실제 서민들의 벌이가 빠르게 좋아지는 현상을 여러 군데서 목격할 수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에게 ‘노다지(bonanza)’가 터졌다”고 표현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생산·서비스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가파르게 올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노동부 통계를 분석, 레저·접객업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이 2019년 4월부터 지난해 4월 사이 30% 가까이 치솟아 같은 기간 전체 노동자 임금 상승률 20%를 훨씬 웃돌았다고 보도했다.
레스토랑 종업원의 시간당 임금 중간값은 14달러로 미 연방정부 최저임금(7.25달러)의 거의 2배에 육박했다.
대학 학위가 필요 없는 대신 도제식 견습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일자리의 임금은 더 높아졌다.
기계공은 시간당 23.32달러(약 3만원), 목수는 시간당 24.71달러(약 3만2000원)를 각각 버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미국의 한 구직 사이트를 검색해 본 결과,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시의 전체 구직 게시물 4941개 중 시간당 15달러 아래의 시급을 제시한 게시물은 34개(0.7%)뿐이었다.
NYT는 “정부 데이터를 자체 조사한 결과 작년(7월 기준) 미국 전역에서 6만8000명만이 연방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시급을 받았고, 이는 전체 시간제 근로자 1000명당 1명이 안 되는 수준이다”라고 전했다.
2013년만 해도 최저임금 수준의 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150만명이 넘었는데, 10년 만에 그 수가 95%가량 대폭 줄어든 것이다.
미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11월 미국의 평균 시간당 임금은 34.1달러(약 4만5000원)로 지난 12개월 동안 4% 증가했다.
저임금 소매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임금도 꾸준히 인상돼 시간당 평균 23.86달러(약 3만1000원)를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임금이 솟구쳤을까.
미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23년 12월 기준 미 전역에서 신규 일자리가 940만개가량 새로 열렸는데, 실업자는 630만명에 불과했다.
실업자를 모두 새로운 일자리에 강제로 취직시킨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300만개 넘는 일자리가 남는 수준이다.
결국 일자리는 넘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임금이 자연스럽게 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특히 인구 고령화로 젊은 인력을 찾기 어려운 선진국일수록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직종에서 구인난이 심화되고 있다.
글로벌 인력 공급 업체 맨파워그룹이 지난해 41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77%의 기업이 직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대답했다.
불과 8년 전인 2015년만 해도 인력난을 호소한 기업은 약 절반 정도인 38%에 그쳤는데 거의 두 배 수준으로 오른 셈이다.
특히 산업 동력 고갈로 지난해 선진국 중 유일하게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는 독일에서조차 노동 수요만큼은 강력하게 유지됐다.
2005년 11%를 기록했던 독일 실업률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 3%까지 떨어졌다.
새로운 일자리도 월 73만3000개가량(2023년 11월 기준) 공급돼, 2013년 11월(45만 8000개)과 비교하면 60% 증가했다.

저숙련·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이 크게 오르자, 경제학자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퇴조에도 주목하고 있다.
전미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임금 하위 10%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시급)은 코로나가 막 터졌던 2020년 1월과 견주어 8.1% 늘었다.
이에 비해 임금 분포의 정중앙(50%)에 위치했던 노동자들 소득은 1%만 증가했고, 상위 10%는 오히려 1.5% 줄었다.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논문을 쓴 데이비드 오터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과 교수는 “2020년 이후 저소득층의 가파른 임금 증가는, 지난 40년 동안 쌓여 온 임금 불평등의 약 5분의 2를 사라지게 할 정도”라고 했다.
다른 연구에서도 엇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미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소득 계층을 다섯 단계로 나눠 코로나 팬데믹 기간 3년(2019~2022년) 동안 임금이 얼마나 늘었는지 조사해 본 결과 소득 하위 10% 계층이 9% 오르며 1위를 차지했다.
소득 상위 10% 계층(4.9%)과 비교해 보면 훨씬 가파른 성장세다.
하위 10% 계층의 소득이 이처럼 가파르게 오른 것은 조사 시작점인 1979년 이래 처음이었다.
앞서 글로벌 금융 위기 땐(2007~2009년) 블루칼라에게 타격이 컸다.
기업들은 생산 감축 카드로 생산직 노동자부터 잘라냈다. 임금 상승도 더뎠고 소득 불평등도 더 커질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대역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부유한 세계에서 노동자들은 이제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노동력은 점점 희소해지는 데다, 기술로 대체하기 어려운 육체 노동에 대한 보상이 더 좋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블루칼라 대반전의 원인으로 첫손에 꼽히는 것은 ‘생산 가능 인구(15~64세)’ 감소다.
선진국 위주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일할 사람이 점점 줄자, 노동력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생산 가능 인구는 역사상 가장 느린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10년 뒤엔 감소세로 돌아설 것이란 게 전문가들 예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