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축구 대표팀의 사우디아라비아 평가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중앙선 근처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둥글게 모여 있었다. 그런데 주장 손흥민(31·토트넘)이 없었다. 손흥민은 근처에서 왼발과 오른발을 두 번씩 구르며 지그재그로 뛴 뒤 합류했다. 그만의 ‘루틴(routine)’이다. 손흥민은 이날 중원과 최전방을 넘나들면서 활약했고,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손흥민은 이 밖에 경기장 입장할 때 오른발부터 딛는 루틴도 갖고 있다.
스포츠 세계에선 경기 전후 특정 행동·동작을 반복하는 루틴에 빠진 선수들이 많다. 그렇게 해야 심리적 안정감을 찾고 경기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 영웅 스즈키 이치로(50·은퇴)는 그 방면에선 경지에 이른 선수다. 수도승처럼 하루 24시간을 루틴으로 채웠다. 매일 아침 10시 일어나 오후 1시 40분 아내가 만든 카레를 먹고, 야구장은 반드시 경기 시작 5시간 전에 도착한다. 타석에선 매번 배트를 쥔 오른팔을 투수 쪽으로 뻗고,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잡는다. 동료였던 투수 R. A 디키(49·은퇴)는 “훈련 때 이치로는 배팅 스윙 횟수부터 욕실 이용 시간까지 분 단위로 정확히 지켰다. 시즌 162경기 내내 전혀 변함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치로는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면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생각하면 저절로 된다”고 설파한다. 타이거 우즈(48·미국)는 경기 직전 연습장에서 모든 클럽을 차례대로 쳐본 다음, 연습 마지막 순서로 첫홀 티샷에 쓸 클럽을 잡고 바람과 핀 위치를 상상하며 샷을 한다. 제대로 가지 않으면 손을 수건으로 닦은 뒤 다시 클럽을 꺼내 샷을 한다.
데미언 브레버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교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훈련과 상관없는 루틴이 실제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74%가 넘는다. 전문가들은 선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루틴은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고 설명한다.
루틴과 훈련 습관, 버릇, 미신, 징크스(jinx)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이치로처럼 훈련 일정과 연관 있는 루틴이 있는가 하면 기량과 무관하게 집착하는 루틴도 많다. 선수들은 개인 특유 루틴을 주술처럼 행하면서 긴장감을 푼다. 미 프로야구 류현진(36·토론토 블루제이스)은 선발로 나서 승리한 경기 직전 먹은 음식을 패전 투수가 될 때까지 끼니마다 먹는다. 공을 던지기 전 50도 넘는 열탕에서 30분 넘게 있는 것도 그중 하나. 어떤 역학적 관계가 있다기보단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란 이유다.
1990~2000년대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투수 스티븐 클라인(51·은퇴)은 한 시즌 내내 같은 모자만 썼다. 남들은 악취가 난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는 모자가 더러워지는 만큼 (헌신적으로 경기를 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한국 양궁 간판으로 나서는 김우진(31)은 시합 날 ‘빵’(빵점), ‘죽’(죽쑨다) 등 불길한 표현과 관련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런 건 사실 미신에 가깝다. 김용세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연구위원은 “스포츠는 경기장 환경과 관중 등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요인이 많다. 어디서든 스스로 통제 가능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선수들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말했다. 다만 “매번 일정하게 할 수 없는 특정 행동을 경기 결과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징크스 같은 미신적 믿음을 만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남자 테니스 이형택(47) 오리온 감독은 선수 시절 관중석에 온 어머니를 발견하면 무조건 패배하는 징크스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되도록 관중석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은퇴할 때까지 이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선수들이 이 같은 비(非)경기적 요소에 흔들리는 걸 최소화하기 위해 팀에선 대책도 세운다. 여자 프로농구 청주 KB스타즈는 2015년부터 멘털 코치를 따로 뒀다. 스포츠심리상담사 출신 최옥숙 코치가 있다. 그는 “직접 훈련을 보고 대화하면서 루틴 강박에 시달리는 선수를 찾는다. 루틴이 심리적 안정에 좋다지만, 3~4개가 넘어가면서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특정 루틴과 경기력은 무관하다는 걸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알려준다”고 했다. 팀 선수 중 경기 직전 무조건 날 음식(육회나 생선회 등)을 먹어야 한다는 선수가 있었는데 날 음식을 찾기 어려운 해외 원정 경기에선 불안해했다. 그래서 최 코치는 “몇 달 동안 꾸준히 면담하면서 그 징크스를 치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자 테니스 라파엘 나달(37·스페인)은 지켜야 하는 루틴만 12개나 된다. 마시는 물병은 상표가 코트를 향하도록 둔다. 경기 45분 전 찬물 샤워를 한다. 수건으로 땀을 닦는 건 포인트(점수)가 바뀔 때만 등이다. 이게 징크스냐 루틴이냐 외부에선 왈가왈부하지만 정작 나달은 “고민해 본 적 없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할 뿐”이라고 말했다.
☞루틴(routine)
스포츠 선수가 경기장 안팎에서 특정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 신체 리듬을 찾고 심리적 안정을 주는 효과가 있다. 강박에 가까워지면 징크스(jinx)로 바뀔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