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斷想

[21823]창극은 지금 가장 뜨거운 연출가들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신세계이자, 새 작품을

ironcow6204 2023. 8. 4. 08:55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200석이 공연 20여 일 전에 이미 전 회차 전석 매진됐다. 
톱스타가 나오는 대극장 뮤지컬의 기록이 아니다. 11일 막을 내린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유은선)의 신작 ‘베니스의 상인들’이 거둔 성과다. 
국내 최고 창작진이 셰익스피어 대표 희극을 재해석하는 야심찬 시도에 관객은 뜨겁게 호응했다. 
창극단은 지난 3월 웹툰 원작의 ‘정년이’, 지난해 3월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 코로나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1월 내놓은 중국 경극과 창극의 만남 ‘패왕별희’ 등 신작들을 줄줄이 전회 전석 매진시키고 있다.<그래픽> 
‘베니스의 상인들’ 대본을 쓴 김은성 작가는 개막 전 간담회에서 “몇 해 전부터 창극 보는 게 큰 즐거움이 됐다. 작품이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아 ‘창극은 지금이 전성기구나’ 싶어 부러웠다”고 했다.

 

 


<창극 '정년이'의 주역 창극단 배우들과 웹툰 '정년이' 포스터. 

왼쪽부터 '윤정년' 역의 이소연, '허영서' 역의 왕윤정, '권부용' 역의 김우정>

 


지난 3월 창극 ‘정년이’의 공연 시작 전 안내 방송 멘트는 “명절 귀성표보다 더 구하기 힘들다는 창극 정년이 표를 구하신 관객 여러분…”으로 시작됐다. 
창극은 지금 가장 뜨거운 연출가들이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신세계이자, 새 작품을 올릴 때마다 회전문 관객이 생기고 ‘창극단 아이돌’을 사모하는 팬들이 길게 줄을 서는 흥행 장르다.

 

 




오랫동안 판소리 다섯 바탕의 틀에 얽매여 있던 창극이 숨 가쁘게 진화하기 시작한 것은 김성녀(72) 예술감독 재임기인 2012년 레퍼토리 시즌 즈음부터였다. 
창극은 본래 조선말에 소리꾼 여럿이 서양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한 무대에 서서 노래하며 시작된 장르. 
김 전 감독은 ‘정통’이라 할 만한 정형화된 양식이 없는 창극이 스스로를 향해 ‘창극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변신을 거듭하는 지난한 과정을 이끌었다. 
김 전 감독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해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시대와 호흡할 수 있다는 건 창극의 큰 장점”이라며 “저는 밑불을 지폈을 뿐이지만, 변화가 예술적 성취와 관객층 확대로 이어지며 이제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느낌”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을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이 다시 쓴 창극 '리어'. 
갓 서른이 된 젊은 창극단 배우 김준수의 리어왕 연기로도 화제를 모았다>


최고의 창작자들이 창극의 새로운 도전에 매료돼 힘을 보탰다. 
한태숙이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을 무대에 올렸고, 이번 ‘베니스의 상인들’을 연출한 국립극단 예술감독 출신 이성열은 사실주의 희곡의 걸작인 차범석 원작 ‘산불’을 창극으로 만든 바 있다. 
‘조씨고아’ 고선웅 연출은 우리 소리의 해학을 극대화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 이어 작년엔 수궁가를 재해석한 ‘귀토’를 선보였다. 
‘최고’가 ‘최고’를 만들면서, 창극을 ‘여러 명이 나오는 판소리’ 혹은 ‘덜 까부는 마당놀이’ 정도로 여기던 편견은 깨져나갔다.


해외 예술가들의 과감한 재해석도 잇따랐다.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가 찬반 논쟁을 불렀고,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이 에우리피데스 비극을 창극화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해외 공연에서 찬사를 받는 창극단 대표 레퍼토리가 됐다.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 오페라 원작의 ‘오르페오전’ 등에 이어 뮤지컬 연출가 김태형의 SF창극 ‘우주소리’도 태어났다.

 

 

 


정한(情恨)을 표현하는데 강한 우리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창극은 그동안 비극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단종의 마지막 신하의 눈물겨운 부성애와 충심을 담은 ‘아비·방연’,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리어왕’을 배삼식 작가의 극본으로 옮긴 ‘리어’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공연된 ‘베니스의 상인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창극이 정통 희극적 접근으로도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조금 과하게 두드러지는 전자음의 사용, 뮤지컬 안무에 가까운 활달한 움직임 같은 요소가 창극의 정수라 할 배우들의 ‘우리 소리’를 가리는 듯한 아쉬움은 공연을 거듭할수록 나아질 것이다. 
다만 서양 희극의 유머를 어떻게 결이 다른 한국적 해학과 흥으로 녹여내느냐의 문제는 숙제로 남은 듯 보인다.


지금 가장 인기있는 젊은 세대의 놀이터인 웹툰을 원작으로 한 창극 ‘정년이’의 흥행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소리의 전통에 단단히 뿌리내릴 때,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담는 그릇으로 창극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최신 사례였다.


‘정년이’는 시골 장터에서 소리를 팔던 ‘정년이’가 당대 최고의 인기 대중예술이었던 여성국극단에 들어가며 여성에 차별적인 시대와 배우로서 자신을 옭아맨 한계를 모두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 
작창(作唱)을 맡은 이자람 음악감독은 전통 소리와 창극뿐 아니라 연극과 인디밴드 음악까지 종횡무진 활약해 왔다. 
그가 쌓아온 음악적 역량은 여성국극 장면에서 보여주는 우리 소리의 탄탄한 전통, 트로트로 특징지어지는 여성국극 바깥 세계의 파격을 지나, 현대적 편곡으로 인물 내면을 표현할 때 빛을 발한다. 
창극 ‘정년이’는 특히 웹툰의 인기와 ‘쌍끌이’로 젊은 여성들까지 관객층을 넓힌 의미도 크다.


최고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단련하고 성장한 창극단 배우들은 이제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다. 
박병성 공연 평론가는 “국악 경연 TV프로그램 등을 통해 창극단 스타 배우들의 팬층이 더 넓어진 듯하다. 
기존에 비해 관객이 훨씬 다양해지고 공연 때 반응도 새로워졌다”고 했다. 
김준수(31) 배우의 팬들은 지난달 ‘절창’에 이어 이번 ‘베니스의 상인들’ 연습 기간에 스태프와 출연진 140명 분의 고급 도시락과 커피 차량을 보내기도 했다. 
창극단 관계자는 “8일 첫 공연 뒤 주요 배역 5인의 사인회를 했는데 자정 가까이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고 했다.


창극단은 오는 8월 세계 최대 공연 축제인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진출한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을 창극화한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할 계획. 
안숙선 명창이 작창(作唱)하고 ‘기생충’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한 작품이다. 
전성기를 맞은 창극의 새로운 도전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23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