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그녀의 삶이 곧 역사.

ironcow6204 2022. 12. 1. 19:36

 

 

영국 정부는 국왕의 사망에 대비, 시대적 의미를 담은 코드(암호)를 준비해 작동시켜 왔다. 
선대 국왕 조지 6세의 경우 ‘하이드파크 코너’였고, 엘리자베스 2세는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다(London Bridge is down)’였다. 
이 코드는 단순한 구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영국 언론 매체들이 지적했다. 
여왕은 70년간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영국인의 ‘혼(psyche)’을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그의 서거는 마치 영국의 가장 중요한 다리가 끊긴 것과 같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2016년 4월 21일 런던 근교 윈저에서 90번째 생일을 환영하는 군중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연둣빛 모자와 의상이 우아하고 인자한 여왕의 자태를 빛나게 하고 있다.>

 


여왕은 192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탄생 당시 권력 승계 순위 3위인 엘리자베스가 국왕이 될 것 같지 않아 할아버지 조지 5세가 빅토리아를 고집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다.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겠다며 왕위를 포기한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와 말이 어눌하고 유약했던 아버지 조지 6세와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어릴 적부터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 
열네 살에 불과했던 1940년 동생 마거릿 공주와 더불어 라디오 방송에 출연, “평화가 온다면 그것은 지금 어린이들인 우리들의 것”이라며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더 좋고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성세대를 향해 당부했다.


스물한 살 생일 때는 “내 인생이 길건 짧건 간에 평생을 바쳐 국민과 왕실을 위해 봉사할 것을 맹세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엘리자베스 재임기를 관통하는 문구가 됐다. 
여왕은 즉위 70주년을 맞은 올해 2월 “1947년의 맹세를 다시 강조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육군 운전병과 정비병으로 복무하던 중 트럭 앞에서 포즈를 취한 공주 시절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여왕은 영국적십자사 등 620여 개 사회단체를 후원하며 자선 활동에 힘을 쏟았다. 
왕족 여성 중 군복무를 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1945년 공주 시절 엘리자베스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 영국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취사, 매점 관리 등 비(非)전투 업무에 배치됐지만, 나중에는 탄약을 관리하고 차량을 수송·정비하는 부서에서 일했다. 
그는 1947년 그리스 왕자 출신인 해군 장교 필립공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이후 찰스, 앤, 앤드루, 에드워드 등 3남 1녀를 낳았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을 상징하는 ‘글로벌 군주’로서 정치, 외교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윈스턴 처칠에서 마거릿 대처,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에 이르기까지 15명에 이르는 총리를 상대하는 동안 정치적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자제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적절한 선에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선포할 당시 국왕의 승인을 요구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전쟁을 승인하면서도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는데, 부모로서 매우 걱정스럽다”며 전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단기간에 종료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착실히 다져 온 왕실의 권위와 인기는 1981년 7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가 결혼 전부터 사귀던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던 사실이 그 후에 알려지면서 왕실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 당시 해리 왕손이 미국인 여배우 메건 마클과 결혼한 뒤 왕실을 떠나고, 이후 왕실의 인종차별 논란이 커지면서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

 

 

<1950년 3월 22일 공주 신분이던 여왕이 윈스턴 처칠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여왕은 70년간 재임하는 동안 구심력이 줄어드는 영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그 자체였다. 영국과 영연방의 지속성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고 평가했다. 
2011년 5월 영국 군주로서는 조지 5세 이후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했다. 
2012년 6월에는 독립을 요구하며 오랫동안 유혈 분쟁을 해온 북아일랜드를 찾았고, 그의 친척 마운트배튼 경을 암살한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의 총사령관과 역사적 만남을 가졌다. 
유튜브에 왕실 소식을 전하는 ‘로열 채널’을 열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을 만드는 등 국민과 접점도 늘려갔다.


1961년 영연방 국가인 가나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는 엘리자베스의 담대함과 외교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갓 독립한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소련을 가까이하려고 했다. 
또 당시 가나에서는 폭발 테러가 빈번해 영국 의회는 여왕의 방문을 반대했다. 
이때 “내가 가나를 방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방문해 좋은 반응을 보인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말로 의회를 설득했다. 
가나를 방문한 여왕은 은크루마 대통령과 사교 댄스를 함께 하며 그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국가원수로서 엘리자베스 2세는 각국 정상들과 폭넓은 외교 활동도 벌였다. 
해리 트루먼에서 조 바이든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이나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같은 독재자들을 만나 ‘일침’을 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국 킹스 칼리지의 버논 보그다노 교수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군주제를 원하지 않는 영국인들조차 96세 할머니의 사망에 이렇게 애도하는 것은 영국인들이 본능적으로 그가 얼마나 나라를 사랑했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왕은 한국 대통령과도 세 차례 만남을 가졌다.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했으며,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영국 국빈 방문 행사에서 만났다.(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