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斷想

[21443]“(제 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하고만 사는 것”이라고 했던 말이

ironcow6204 2022. 9. 1. 12:36

 

 

 

“콩쿠르 기간에는 유튜브 등을 모두 지웠어요. 그래서 콩쿠르 기간은 물론, 사실은 지금도 제 연주를 제대로 듣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30일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홀. 
올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역대 최연소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이 수줍게 말했다. 
그의 대회 결선 곡이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서 조회 수 350만회를 기록할 만큼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콩쿠르가 끝난 뒤에도 굉장히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그야말로 ‘임윤찬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음악 칼럼니스트 이지영)는 말 그대로다. 
그런데도 정작 그 주인공이 자신의 연주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고백한 셈.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열린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임윤찬은 지난달 18일(현지 시각)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북미 최고 권위의 음악 콩쿠르인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이다. 또한 특별상으로 신작 최고연주상과 청중상을 받아 대회 3관왕을 기록했다.>

 


평소 임윤찬은 말주변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지만, 정작 올해 콩쿠르 이후 그의 말들은 ‘임윤찬 어록’으로 불리면서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대회 우승 직후인 지난 18일 현지 기자 회견에서 “(제 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하고만 사는 것”이라고 했던 말이 대표적이다. 
이날 간담회에서도 ‘임윤찬 어록’은 어김없이 쏟아졌다.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우승했다고 달라진 건 없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실력이 느는 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연습하겠다”고 답했다. 
임윤찬은 평소에도 하루 12시간씩 피아노를 치는 지독한 ‘연습 벌레’로 유명하다. 
임윤찬을 롤모델로 삼는 후배 연주자가 많다는 말에는 “(저를) 롤모델로 삼으면 안 된다. 저보다 훌륭한 전설적 피아니스트들을 롤모델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올해 콩쿠르 2차 라운드에서 바흐 독주곡 이후 다음 곡인 스크랴빈의 소나타 2번으로 넘어가기 전에 건반 앞에서 묵상하듯이 90초간 침묵을 지켰던 장면도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임윤찬은 “바흐에게 너무나 영혼을 바치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스크랴빈으로 곧바로 넘어가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를 시작하기 전에도 “음, 어”라면서 몇 번씩 곱씹거나 머뭇거리지만, 그 말을 옮겨 놓으면 훌륭한 답변이 되는 것도 임윤찬만의 매력이다. 
“(윤찬이는) 산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미 피아노 안에서는 도사가 된 것 같다”는 스승 손민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평가가 실감났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손민수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열린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악수하고 있다.>

 



임윤찬은 이날 간담회 직전 스크랴빈의 전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2번 1악장을 들려줬다. 
스크랴빈의 소나타 2번은 쇼팽의 낭만주의에 인상주의적 색채가 포개져 있어서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 
임윤찬 역시 콩쿠르 당시 연주했던 곡이어서 훌륭한 ‘재연(再演)’ 무대가 됐다. 
이날도 특유의 뻣뻣하고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들어와서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한 뒤 건반 앞에서 상념에 잠기는 임윤찬의 ‘의례’는 빠지지 않았다. 
연주 도중에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에도 낭만적이면서도 유려한 터치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무대 입장부터 연주를 시작할 때까지 시종일관 반듯함을 잃지 않는다면, 임윤찬은 예측 불허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반전(反轉) 매력이 있다. 
이날 사진 촬영 때에도 임윤찬은 줄곧 쑥스러운 듯한 포즈를 짓다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무대를 총총 떠났다. 
그런데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흠결 없는 연주력과 폭발적 타건(打鍵), 확신으로 가득한 해석을 선보인다. 
어쩌면 ‘10대 소년’과 ‘애늙은이’의 공존이야말로 임윤찬만의 개성일지도 모른다.

 

 




이날 간담회에는 스승인 손민수 교수가 동석했다. 
현재 한예종 2학년인 임윤찬은 2017년 한예종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손 교수를 처음 만난 뒤 6년째 사사하고 있다. 
스승 손 교수는 임윤찬에게 피아노 지도는 물론,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임윤찬은 “예전부터 헤세의 ‘데미안’과 법정 스님의 책 등을 즐겨 읽었지만, 지금도 계속 읽게 되는 책은 단테의 ‘신곡’”이라고 말했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작(連作) ‘순례의 해’ 가운데 ‘이탈리아’의 마지막 곡이 ‘단테 소나타’. 
임윤찬은 2020년 독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할 당시부터 ‘신곡’을 거듭 읽었다. 
그는 “단테의 ‘신곡’은 여러 출판사의 번역본을 모두 구해서 읽어 보았다. 
유일하게 전체를 외우다시피 할 만큼 읽은 책”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이 사제(師弟)의 관심사가 기교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손 교수는 미국 보스턴의 명문 뉴잉글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명피아니스트 러셀 셔먼(92)을 사사했다. 
셔먼은 음악 전반에 대한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손민수·임윤찬 사제에게는 기술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한예종의 풍토와 셔먼의 인문학 정신이 공존하는 셈이다. 
올해 임윤찬의 우승 이후 셔먼의 책 ‘피아노 이야기’도 음악 도서 분야 1위에 올랐다.

 

 




임윤찬은 임동민·동혁 형제를 필두로 손열음·김선욱·선우예권·조성진·문지영·박재홍까지 국제 콩쿠르를 통해서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막내’에 해당한다. 
2000년대 들어서 임윤찬처럼 별다른 해외 유학 없이 우승한 피아니스트도 크게 늘어났다. 
스승 손민수 교수는 “윤찬이가 보여주는 진정한 자유, 음악의 힘이 조그만 연습실에서 끊임없는 자기 단련과 절제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이날 장맛비가 내리는 한예종 정문에는 임윤찬의 우승을 축하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국내외 음악계에서도 ‘임윤찬 효과’는 확인된다<그래픽>. 
지난 2020년 녹음한 임윤찬의 피아노 음반은 현재 교보문고·알라딘·예스24의 클래식 베스트 1위에 올라 있다. 
음반 제작 유통을 맡은 아울로스 미디어 측은 “콩쿠르 우승 이후 판매량이 급증해서 2000~3000장 추가 제작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8월 10일과 2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임윤찬의 협연 무대 역시 이미 매진됐다. 
8월 26일과 10월 5일 열리는 지휘자 정명훈과의 협연도 ‘광클(빛의 속도로 클릭한다는 의미의 신조어)’로 불리는 치열한 예매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12월 10일에는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도 열린다. 
그 사이에 7월부터는 미국 아스펜 축제를 시작으로 북미 투어가 시작되고, 싱가포르·홍콩·대만 등 아시아 투어도 11월에 열린다.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하고만 사는 것”이라는 소년의 꿈은 당분간은 현실이 되기 힘들 것 같다.(22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