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斷想
[21367]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밖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ironcow6204
2022. 6. 27. 11:07
광주광역시 무각사(無覺寺) 대웅전 앞마당엔 대형 백련(白蓮)이 피었다.
5월의 신록을 배경으로 잔디밭에 설치된 지름 5미터가 넘는 흰 연꽃 조형물은 재독 미술가 김현수(67)씨의 작품.
그러나 이 백련은 미완성이다. 부처님오신날(8일) 저녁, 사람들이 둘레에 서서 108배(拜)를 올릴 때 완성되는 작품이다.
사람들의 간절한 정성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이다.
<무각사 대웅전 앞마당 김현수씨의 작품 '백련' 앞에 선 청학 스님.
스님은 "어려울 때일수록 아프고 슬픈 이를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다>
무각사가 그렇다.
이 사찰은 최근 15년에 걸친 불사(佛事) 끝에 대웅전 삼존불의 점안식을 마쳤다.
주지 청학(69) 스님은 2007년 비가 새는 군법당에 주지로 부임해 15년 만에 무각사를 광주의 대표적 도심 사찰이자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대변신시켰다.
그러나 청학 스님은 “건물은 기도하는 집일 뿐, 사람과 신심(信心)이 채워져야 진정한 불사”라고 말했다.
-스님은 송광사 향봉, 구산, 법정 스님과 인연이 각별하시지요. 어떻게 출가하셨나요.
“젊은 시절 여러 곳을 방랑했습니다.
하루는 송광사에 묵게 됐는데, 다음 날 아침 ‘방장 스님께 인사 드리고 가라’는 거예요.
구산 스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대뜸 ‘어디서 왔는고?’ ‘무엇이 왔는고?’ ‘네가 어디 있는고?’ 잇따라 물으시고는 ‘주인공을 찾으라’ 하셨어요.”
-선문답(禪問答)을 하신 셈이군요?
“얼떨떨한 마음에 법정 스님이 계시는 불일암으로 가봤어요.
저녁 무렵이었는데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계시더군요.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문득 ‘저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여쭸어요.
‘밖(사회)에서 잘못한 일 있느냐’고 물으셔서 ‘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주민등록 있으면 됐다.
큰절에 이야기해주겠다’고 해서 그날로 행자 생활 시작했습니다. 1976년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엔 출가자로서 자신이 안 생겨서 3년 행자 생활 하다 향봉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습니다.”
-어른 스님들께 어떤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구산 스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구산 스님은 제도권 학교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당당하면서 동시에 수행엔 그렇게 간절하실 수가 없어요.
말씀보다는 삶 전체, 절 용어로 ‘살림살이’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당당함과 간절함으로 대중을 포용해 대가람을 이끄셨지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오색연등이 무각사 마당을 가득 채웠다.>
청학 스님은 출가 초기 송광사와 통도사 선방(禪房) 등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다가 1980년대부터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법정 스님을 수련원장으로 모시고 수련국장을 맡아 송광사 수련회를 전국 조직으로 확산했고, 김영한(1916~1999) 보살로부터 법정 스님이 시주받은 서울 성북동 대원각을 길상사로 변모시켜 초대 주지를 지냈으며 프랑스 파리 길상사를 개원하는 데에도 실무를 도맡았다.
2000년대 초엔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단장을 맡아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안착시켰다.
2007년 당시 무각사는 존폐 위기였다.
주지로 부임한 청학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새벽 4시, 오전 10시, 오후 6시 하루 세 번씩 기도를 시작했다. 주지가 바깥출입을 끊고 항상 절에서 기도하니 신도들이 돌아왔다.
목탁은 숱하게 깨져 나갔고, 휴대전화는 쓸 일이 없어 처음엔 벽장에 집어넣었다가 아예 없앴다.
첫 번째 1000일 기도가 끝난 후에야 ‘불사(佛事)’를 시작했다.
불사 순서도 먼저 갤러리와 서점 등을 열어 문화예술이 깃들게 한 후 법당 공사는 마지막이었다.
불자가 아닌 시민들까지 무각사를 찾기 시작했다.
무각사는 청학 스님에겐 무문관(無門關)인 셈이었다. 기도는 총 3500일 동안 이어졌다.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서 바라본 대나무 숲.
이 갤러리는 실력 있는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리는 명소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