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수목원 일궈…템플턴도 돈 맡겨
‘아름다운 투자자’ 민병갈의 남다른 투자법
태안반도 끝자락에 그림처럼 자리한 천리포수목원. 30cm만 땅을 파도 염분이 나오던 민둥산 박토에서 세계가 먼저 알아준 아름다운 수목원을 일군 주인공은
‘파란 눈의 한국인’ 민병갈이다.
그는 평생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었고 이를 아낌없이 수목원에 쏟아 부었다. ‘아름다운 투자자’ 민병갈의 삶과 그동안 묻혀 있던 그의 남다른 투자법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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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버스에서 내린 중년 여성들이 숲 해설사의 맛깔스러운 설명을 들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봄을 맞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 수많은 희귀종 꽃에 취해 어린아이들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들이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 해수욕장 바로 옆에 자리한 천리포수목원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 1970년부터 작년까지 39년간 이곳은 일반인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금단의 땅이었다.
설립자인 민병갈 원장은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몰려온다며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그는 ‘사람을 위한 수목원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수목원’을 꿈꿨다.
민 원장의 나무 사랑은 유별났다. 나무를 보기 좋게 하려고 인위적으로 다듬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를 지켜만 줄뿐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
통행로를 막는 거추장스러운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냈다가 그 자리에서 해고당한 직원도 있다.
수목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980년대 중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힐리어 가든의 4대째 주인이 찾아왔다.
그는 수목원을 돌아본 뒤 나무가 뒤죽박죽 심어져 있다며 땅을 밀어 버리고 완전히 뜯어고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민 원장은 “자식처럼 키운 나무들에 상처를 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묘목을 심어 울창한 숲으로
천리포수목원 나무에는 파란색 표찰이 하나씩 붙어 있다. 일종의 ‘나무 호적’이다.
수목원 생태교육관 지하에는 표찰에 표시된 일련번호 순으로 연필로 꼼꼼히 기록된 일지가 지금도 보관돼 있다.
거기에는 처음 묘목을 들여와 심은 시기와 장소, 병력 등 나무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목원 홍보 담당인 최수진 씨는 “민 원장님은 씨앗과 묘목을 심어 울창한 숲으로 길렀다”며 “잘 자란 멋진 나무를 옮겨 심은
일반 수목원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민 원장이 처음부터 수목원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은행 동료들과 만리포 해수욕장에 놀러 왔다가 지역 주민의 청으로 땅 1만9830㎡(구 6000평)를 마지못해 산 것이 59만4900㎡(구 18만 평)에 달하는
수목원으로 불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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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처음 나무를 심을 때 민 원장은 나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초기 외국에서 들여온 귀한 수목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다. 이때의 안타까운 경험 때문에 민 원장의 나무 사랑은 더욱 애틋해졌다고 한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에는 1만3200여 종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 수종에서 국립수목원을 훨씬 앞지른다. 특히 400여 종에 달하는 목련과 370여 종을 보유한 호랑가시나무는 세계적이다.
일류 수목원을 만드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똑같이 천리포수목원을 모델로 삼아 대규모 수목원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1970년대 중반 이병철 창업자는 용인 자연농원을 추진하면서 수목원 조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삼성 직원들이 여러 차례 천리포를 방문해 자료를 수집해 갔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병철 창업자가 직접 수목원에 2박 3일간 묵으며 둘러보려고 하니 그가 머무를 특별 숙소를 마련해 달라고 주문했다. 물론 돈을 넉넉하게 준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민 원장은 “우리 수목원은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한다”며 거절했다.
박 전 대통령도 서울시에 수목원을 조성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서슬 시퍼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무원들이 천리포에서 하숙까지 하며 6개월간 수목원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곧 이은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민 원장의 본명은 ‘칼 페리스 밀러’다. 1921년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의 시골마을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 일본어 통역 장교로 있던 그는 1945년 일본 패전과 함께 서울로 파견돼 한국 땅을 밟은 첫 연합군 장교가 됐다. 그 후 미군정청과 국제개발처(AID) 직원으로 계속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1955년 한국은행에 자리를 잡으면서 아예 눌러앉았다.
‘민병갈(閔丙渴)’은 1979년 국내 1호로 한국인으로 귀화할 때 직접 지은 이름이다. 한국은행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의 성과 돌림자를 따온 것이다. 민 전 총재도 퇴임 후 민 원장의 도움을 맡아 평생 남이섬을 가꿨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민 원장은 1980~90년대 주식시장에서 ‘큰손’으로 유명한 투자자였다.
당시 증권가에서 그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56년 증권시장 개장 때부터 주식 투자를 해 온 민 원장은 1983년 한국은행 퇴임 후에는 한양증권과 쌍용투자증권(현 굿모닝신한증권)에서
고문으로 본격적인 전업 투자자의 길로 나섰다.
그의 투자 실력은 탁월했다.
홍콩의 경제지 파이스트 이코노믹 리뷰는 민 원장을 ‘아시아 최고의 펀드매니저’로 소개했고 ‘월스트리트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던 존 템플턴 경도
개인 자산 투자를 맡길 정도였다. 민 원장은 이렇게 번 돈을 수목원을 키우는 데 모두 쏟아 부었다.
뛰어난 투자자…‘주식을 가까이 보지 마라’
하지만 민 원장의 투자자로서의 면모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 했기 때문이다.
최남철 전 푸르덴셜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1997년 봄 전설로만 듣던 민 원장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과 성미전자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최 전 매니저는 쌍용투자증권 국제영업부 모 차장으로부터
운용 스타일이 비슷한 외국인 투자자가 있는데 한번 만나 보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며칠 뒤 약속 장소 나간 그는 젊고 스마트한 외국인을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백발의 보청기를 낀 노인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만난 민 원장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며 먼저 악수를 청해 왔다.
민 원장은 그해 여름 최 전 매니저 가족을 천리포수목원으로 초대했다.
최 전 매니저는 “투자 거장과 1주일을 함께 보내면서 투자에 관한 소중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내심 기대했는데
그는 단 한마디도 주식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 원장은 온통 꽃과 풀과 나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민 원장은 휴가 마지막 날 차 한잔을 나누며 최 전 매니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미스터 최, 주식을 절대 가까이서 보지 마세요.
나도 매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울에 가 있지만 계속 보게 되면 빨려 들어가요. 단기 매매를 할 수밖에 없지요.”
최 전 매니저는 이날 민 원장의 짧은 충고를 지금까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는 “왜 프랭클린 템플턴이 투자회사를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플로리다에 세우고 워런 버핏이 한적한 오마하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주식을 가까이서 쳐다보지 않고 초연한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먼 곳을 택했다는 것이다.
당시 민 원장의 한국이동통신 평균 매입가는 4만 원대였다.
최 전 매니저는 “이후 주가가 550만 원까지 올랐다”며 “적어도 50~100배 수익을 올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민 원장은 2002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이동통신 주식을 쥐고 있었다.
최 전 매니저는 “지금도 민 원장님이라면 어떤 종목을 투자할까 항상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민 원장을 여러 차례 인터뷰한 임준수 천리포수목원 감사도 그를 뛰어난 투자가라고 평가했다.
1990년대 중반 민 원장에서 개인 돈을 맡겼던 임 감사는 3만4000원에 산 포스코 주가가 17만 원까지 올라도 팔지 않자 애가 말랐다.
결국 답답해진 임 감사는 자기가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서 주식을 몽땅 팔아치웠다.
임 감사는 “요즘 포스코 주식은 52만 원대”라며 “그대로 갖고 있었다면 부자가 됐을 것”이라며 후회했다.
민 원장은 생전 임 감사와의 인터뷰에서 주식 투자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증권 투자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면 안 됩니다. 유망한 종목을 골라 3~4년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웬만큼 경력을 쌓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신용거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수십 년 동안 민 원장의 생활 패턴은 항상 일정했다.
주중에는 서울에 올라와 명동 쌍용투자증권 지점 2층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주식 투자를 했다.
금요일 오후 3시 주식시장이 끝나면 곧바로 짐을 싸들고 천리포수목원으로 내려가 그가 사랑한 나무들을 돌봤다.
그러다 월요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수목원을 출발해 명동 사무실로 직행했다.
1979년부터 23년 동안 운전사 겸 수행비서 역할을 했던 이규현 천리포수목원 이사는 “2002년에도 금요일까지 주식 투자를 하고
주말에 수목원에 내려와 있다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민 원장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다.
수목원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의 라틴어 학명을 모두 외웠고, 주식 종목 코드도 수백 개를 기억했다.
민 원장은 좀처럼 메모를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웬만한 것은 그대로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독일어에도 능통했고 한자에도 박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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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원장은 처음 유한양행 주식을 사 큰돈을 벌었다. 광복 후 미 군정청 직원으로 일하던 그는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며 가깝게 지냈다.
좀처럼 ‘존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민 원장이었지만 유일한 박사에게는 항상 각별한 경의를 표시했다. 유 박사는 민 원장이 액면가로 유한양행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해줬다. 그는 군생활로 모은 돈을 몽땅 투자했고 이 돈이 이후 주식 투자의 밑천이 됐다.
민 원장을 도우며 그 밑에서 주식 투자를 배운 사람은 바로 유성규 전 미래에셋 부회장이다. 한국은행을 거쳐 1977년 증권 업계에 뛰어든 유 전 부회장은 한양증권과 쌍용투자증권을 거쳐 동원증권 사장과 동원BNP투신운용 사장을 지냈다.
동원증권 시절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한 인물이 바로 당시 상무로 있던 유 전 부회장이다. 이후 미래에셋으로 성공한 박 회장은 2001년 유 전 부회장을 부회장으로 모셔갔다. 어떻게 보면 민 원장의 투자 철학이 박 회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려운 학생들 남몰래 도와
민 원장은 생활은 매우 검소했다.
최 전 매니저는 “수목원에 좋은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침대도 들이지 않고 3단 매트리스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 이사도 “구두를 한 번 사면 밑창과 굽을 수없이 갈아가며 신었고 나중에는 위 가죽까지 바꿀 정도였다”며 “양복을 사는 것도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민 원장을 수행한 이 이사는 “보다 못해 양복을 한 벌 해드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쓰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끼려고 들었지만 수목원 일에는 모든 것을 걸었다.
민 원장은 매년 1~2번 미국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무 경매에 참여해 마음에 드는 묘목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이 이사는 “새로운 품종이 나오면 아무리 비싸도 무조건 사서 갖고 와야 했다”고 기억했다. 때로는 묘목 1개에 100만~200만 원까지 가기도 했다.
민 원장은 나무를 기르듯 사람도 키웠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도 고아 4명을 양자로 입양해 키웠고, 수목원 주변의 재능은 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남몰래 도왔다.
수목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해외 연수 기회를 마련해 줬다.
정석 투자로 좀처럼 실패를 모르던 민 원장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1997년 외환위기로 주가가 폭락하면서 그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이사는 “수목원은 점점 커지고, 브리지 게임을 하다가 졸도하는 일이 일어나자 급격히 자신감을 잃었다”고 말했다.
수목원을 서울대에 기증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지나친 간섭이 우려돼 포기했다. 수목원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이때부터 회원제를 도입했다.
후원 회원을 모집해 이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수목원을 개방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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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원장이 팔십 노구를 이끌고 죽기 직전까지 주식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쩌면 수목원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002년 민 원장 사망 이후 계속 어려움을 겪던 수목원은 결국 지난해 일반 개방을 선택했다.
아직은 전체 59만4900㎡ 가운데 13만2200㎡(구 4만 평)만 제한적으로 개방되고 있지만 ‘인간을 위한 수목원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수목원’이 되기를 원했던
민 원장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이 이사는 “한 사람이 만든 수목원을 우리 국민들이 지키지 못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개구리가 되고 싶어 했다는 민 원장. 마치 그가 환생한 것처럼 돌개구리 한 마리가 묵묵히 수목원을 지키고 있다.
태안=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입력일시 : 2010-04-30 14:48